들어가며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부터 집무실인 청와대를 떠날 뜻을 밝혀왔습니다. “구중궁궐 같은 청와대를 떠나 용산 집무실에서 국민들과 소통하겠다”라며 떠나는 이유를 설명했었는데요. 그리고 취임식 당일인 5월 10일부로 청와대는 시민들에게 개방되었습니다. 개방 당일에는 수만 명의 사람이 몰리기도 했죠.
청와대 이전 공약은 사실 김영삼 대통령 시절부터 꾸준히 있던 논의라고 합니다. 하지만 경호와 이전비용 등 여러 이유로 늘 무산되었다고 합니다. 어째서 역대 대통령들은 청와대를 벗어나려 했을까요? 청와대 공간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요? 건축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순수하게 궁금했습니다. 관련 연구들을 찾아보니 대부분 정치나 사회 관점에서 이뤄진 연구로, 건축학 관점의 분석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아쉬운대로 나름의 이유들을 떠올려봤습니다. 부끄럽지만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볍게 재미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청와대의 입지, 공간배치, 그리고 건축양식의 세 가지 측면에서 문제점을 생각해봤습니다.
입지의 불리함
먼저 입지부터 살펴볼까요. 청와대는 위아래로 북악산과 경복궁 사이에 낀 땅에 위치합니다. 이른바 ‘배산임수'를 만족하는 풍수적으로 좋은 땅인 탓에, 조선 초기부터 경복궁의 후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총독의 관저가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서울의 옛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도성 중앙에서 살짝 위쪽에 위치한 땅입니다.
문제는 20세기 들어 서울시가 남쪽으로 점점 커지면서 발생합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강남도 서울에 포함되죠. 때문에 옛날엔 서울의 중앙에 위치하던 청와대가, 현재는 북쪽 끝에 놓이게 됐습니다. 또 서울의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로 급부상한 강남, 서초 지역과도 멀어졌죠. 게다가 위로는 북악산, 아래로는 경복궁과 광화문에 끼여 있는데, 두 곳 모두 개발이 불가능한 땅이기 때문에 청와대 근처의 도로체계는 굉장히 폐쇄적입니다. 이것은 보안 측면에서는 유리하지만, 국민과의 소통 측면에선 불리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청와대 땅은 얼마나 ‘폐쇄적’일까요? 건축공간을 정량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의 하나로 스페이스 신택스 Space Syntax 라는 것이 있습니다. 공간들이 연결된 상대적인 위치를 입력하면 적외선카메라처럼 시각화를 해주는 도구인데요. 비약이 있지만 쉽게 말하면, 붉을수록 공간이 ‘중심적’이고, 푸를수록 지엽적이고 외진 곳에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것을 청와대와 주변 지역에 적용하면 사진과 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2017년 SBS 스페셜 팀과 세종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분석한 것인데요. 보시는 바와 같이 접근성이 좋지 못한 입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새로 옮긴 용산 집무실의 경우 서울의 중앙에 좀 더 가깝고, 교통상 접근이 편리합니다. 때문에 대통령의 발언대로 시민들과 소통하기에 유리한 측면이 있습니다. 다만 여론 수렴 과정, 이전비용, 상징성, 경호 문제 등을 고려하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습니다.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좀 더 판단의 근거가 될 법한 자료들을 가져와봤습니다(판단은 독자 여러분의 몫입니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유럽 국가들의 대통령 집무실의 입지는 어떨까요?
영국 런던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다우닝 10번가 Downing 10 Street 라는 골목인데요. 이곳에 영국 총리의 집무실이 있습니다. 사진처럼 고풍스러운 건물이긴 하지만, 권위적이라는 느낌은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그 앞을 지나다니면서 주택가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독일 베를린의 벨뷔 궁 Schloss Bellevue 같은 경우는 도심 속 한적한 공원에 집무실이 있습니다. 도로와 집무실 사이에 낮은 울타리 한 겹만 있는 모습이 이국적인데요. 런던과 마찬가지로 시민들이 집무실 앞까지 자유롭게 접근하거나, 심지어 집회를 열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엘리제 궁 Palais de l’Elysee 은 앞선 두 나라보다는 다소 웅장하고 권위적인 모습인데요. 그렇지만 도심 속에서 공원과 강을 근처에 두고 있어서, 관광지처럼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습니다.
이상 살펴본 세 나라 집무실의 공통점은 도심 한복판에 있다는 점입니다. 또 일상적인 맥락, 다시 말해 시민들이 사는 주택가, 공원 근처에 위치해 이들이 집무실까지 자유롭게 접근이 가능한 모습입니다. 대통령 경호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우리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다소 의아할 수 있지만, 그것을 감수하더라도 시민들과 소통을 중시한 배치로 생각됩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기존 청와대 부지는 도심에서 다소 벗어나있는데다 접근성이 아쉬운 것이 사실입니다.
공간 배치의 비효율
다음은 청와대의 공간 배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청와대에는 경호실을 제외하면 크게 4개의 건물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중앙 상단에 큰 건물이 집무실이고, 그 옆에는 대통령 관저가 있습니다. 우측 하단은 여민관인데요. 청와대 직원들이 근무하는 곳입니다. 좌측 하단 영빈관은 귀빈들을 응대하고 만찬을 여는 곳입니다.
문제는 아무래도 건물들끼리 너무 떨어져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직원들이 근무하는 여민관과 대통령 집무실은 500미터 가량 떨어져 있는데요. 참모들이 급한 일이 있을 때 집무실까지 자전거를 타고 왔다갔다 했다고 합니다. 비효율적인 동선이 아쉬운 모습인데요.
이러한 점 때문에 문재인 전 대통령은 여민관 3층에 집무실을 마련했었습니다. 참모들과 가까운 곳에서 소통하며 일하겠다는 것이었죠. 좋은 취지였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어떻게 보면 기존 직원들의 자리를 줄이고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대안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궁금한 것은, 청와대를 설계한 건축가는 이런 비효율을 정말로 예상 못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사견이지만 이런 점은 ‘한국성’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됐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의 고급 건축, 예를 들어 궁궐, 사찰 등을 보면 이른바 ‘분산형 배치’를 하고 있습니다. 건물을 크게 지어서 모든 기능을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잘게잘게 쪼개서 짓고 한 채 한 채에 다른 기능을 부여합니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첫째로 우리나라는 평지가 드물고 지형에 경사가 많습니다. 때문에 자연적인 단차를 그대로 살리며 집을 나눠 짓는 방식이 익숙합니다. 둘째로 나무로 집을 짓기에 건물을 크게 만들기 어렵습니다. 휨에 약한 목재를 수평부재로 사용해야 하므로 건물의 스팬을 늘리는 데 한계가 존재합니다. 이런 조건들이 겹쳐 분산형 배치가 우세하게 된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조심스럽지만 이런 전통건축의 개념을 청와대 설계에서 재해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통령 집무실이 대내외적으로 가지는 상징성을 고려하면 건축가의 선택이 일견 타당해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청와대는 철근콘크리트로 된 건물이지만, 한국 고유의 건축개념을 보여주고자 비효율을 감수하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이런 건축개념은 백악관과 비교해보면 더 뚜렷이 나타납니다. 백악관은 청와대와 정반대의 건축개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집을 크게 한 채로 짓고, 대통령부터 말단직원까지 함께 들어가 일하는 시나리오입니다. 이런 설계는 어찌보면 권위적이거나 동선이 명쾌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대통령과 참모 간 긴밀한 소통은 더 잘 이루어질 듯도 합니다. 실제로 윤 대통령은 백악관 '웨스트윙 West Wing' 같은 집무실을 만들겠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직원들과 함께 중앙집약적인 공간에서 일하겠다는 취지겠죠.
옛날 스타일
마지막으로 청와대의 건축양식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건축에서 흔히 고전 Classicism 으로 불리는 양식이 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 건축의 영향을 받은 스타일을 말하는데요. 고전주의 건축은 조각 같은 원기둥, 삼각형 모양의 지붕 같은 클리셰를 즐겨 사용합니다. 이런 요소들은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화려한 고전주의 양식은 로마시대부터 19세기까지 꾸준히 이어집니다. 그런데 ‘고전의 아름다운 장식들은 불필요하고 실용적이지 않다.’ ‘미니멀하고 기능적인 건물을 짓자’는 주장이 등장합니다(아주 짧게 요약하면 그렇습니다.) 이것이 20세기 초에 등장한 모더니즘 건축입니다.
20세기 말, 모더니즘에 싫증을 느끼며 포스트모더니즘 건축 Postmodernism 이 등장합니다. 포스트모던 건축가들은 ‘모든 건물이 미니멀하고 실용적이다 보니 따분하다.’ ‘옛 양식의 화려함을 다시 쓰자’고 이야기합니다(역시 아주 짧게 요약하면 그렇습니다.) 이들은 사진처럼 그리스의 기둥을 과장되게 표현하거나, 피라미드의 형태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서론이 길었는데요, 청와대의 건축에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아래에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영빈관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데요. 보시는 바와 같이 영빈관의 입면에서 드러나는 비례감, 기둥의 형태, 삼각형 지붕(페디먼트), 대리석의 사용 등은 고전주의의 웅장함, 숭고미를 차용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렇듯 과거의 양식을 가져와 새로운 맥락에서 사용하는 점은 포스트모던 건축의 한 갈래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청와대가 지어진 7~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은 서양건축에서 가장 앞서나간 스타일이었기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추측되는 것입니다. 현재 시점에서는 아무래도 유행이 많이 지났다고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나오며
이상으로 청와대가 건축, 도시 관점에서 어떤 문제가 있을지 알아보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사견이 많이 포함되어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언제든 피드백 부탁드립니다. 앞으로도 건축, 도시와 관련해 쉽고 재밌는 발표 이어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본 게시물은 어떤 정치적 입장과도 무관하며, 순수하게 건축적 관점에서 이뤄진 고찰임을 밝힙니다 :)
박신우
건축학과 건축학전공, 12.5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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