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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M - 학술세미나/etc

디자인을 디자인하다

by STEMSNU 2022. 3. 1.

 

건축설계 과제를 하다보면 가끔 감탄이 나올만큼 뛰어난 선배들의 작업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사실 저는 다른 사람의 좋은 디자인을 보면 아래처럼 복합적인 감정들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 호기심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지?)
  • 도전의식 (해볼만 한 것 같다!)
  • 질투 또는 좌절 (나도 잘하고 싶은데.)
  • 경외 (와, 멋지다는 말 밖에 안 나와.)

아마 건축뿐만 아니라 기계공학 등 설계를 해보신 분들은 공감하실텐데요. 디자인은 직관적인 센스나 창의성이 자주 동원되기에, 은연중 디자이너의 자아가 투영되고 감정이 이입되는 듯합니다. 자꾸 ‘엄친아’와 내 자식을 비교하게 되는 엄마의 마음이라고나 할까요!

고맙게도(?) 몇몇 후배들은 제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제 작업물에 대해 질문하곤 합니다.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 평소에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어요?
  • 어떤 과정을 거쳐 설계했는지 얘기해주세요.

저는 늘 성심성의껏 답을 해주려는 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더 솔직히는 무의미한 대화에 가깝다는 생각도 듭니다(오만한 생각일까요?) 왜냐하면 각각의 디자이너의 디자인 프로세스는 매우 복잡해서 그 원리를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비약이 있지만, 마치 알파고가 어딘가 바둑알을 놓을 때 아무도 그 판단의 이유를 모르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디자이너 스스로도 자신의 디자인 원리를 모르는데, 그 얘기를 듣는 다른 사람이 메커니즘을 알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디자인 프로세스라는 것이 얼마나 개인적일 수 있는지 이해를 돕기 위해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프랭크 게리 Frank Gehry 라는 미국의 유명한 건축가가 있습니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하기도 한 인물인데요. 전설처럼 내려져오는 게리의 황당한 디자인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게리가 직원에게 종이를 구기게 한다.
  2. 직원이 종이를 열심히 구긴다.
  3. 게리가 구겨진 종이 중 마음에 드는 걸 고른다.
  4. 구겨진 종이를 3D 스캐닝해서 컴퓨터에 구현한다.
  5. 건물로 만든다.

 

 

믿거나 말거나 하는 농담이지만, 어쨌거나 게리의 대표작들을 보면 종이를 구겨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사진=Walt Disney Hall Concert Hall, LA.) 이처럼 디자이너의 디자인 프로세스는 무척 개인적이고 복잡하므로 규명이 어렵습니다. 그 프로세스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 또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디자인의 이러한 속성을 가리켜 ‘Black Box’라고 이야기합니다. 디자인 결과물이 나와도 그것이 어떤 프로세스를 통해 탄생하는지 모른다는 것이죠. 때문에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과 미국에서는 디자인을 디자이너의 ‘재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세계대전과 산업화를 거치며 새로운 디자인의 대상이 되는 기계들이 대거 등장하고,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재주만으로는 감당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합니다.

이러한 위기에서 영미 디자인학계를 중심으로 1962년 'Conference on Design Methods'라는 세계 디자이너 회의가 열리는데요. 여기서 디자인 프로세스를 표준화하여 시대 흐름에 발을 맞추려는 주장이 처음 등장합니다. 60년대에 힘을 얻었던 이들의 주장을 통상 Systematic Approach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인물과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J. C. Jones: 디자인은 분석, 종합, 평가의 3단계로 체계화할 수 있다.
  • C. Alexander: 디자인은 분석, 종합의 2단계로 체계화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70년대를 전후로 반론이 등장하게 됩니다. 디자인은 애초에 체계화될 수 없기 때문에, 디자인 자체에 내재한 비합리성과 직관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죠. 이는 ‘천재성’, ‘재주’ 등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디자인관과 잘 부합했고, 디자이너들에게 지지를 얻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과 그 주장으로는,

  • H.W.J. Rittel: 과학 문제는 뚜렷한 목적을 갖지만, 디자인 문제는 문제를 정의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 ‘사악한 문제’이다. (Wicked Problem이라는 유명한 표현을 처음 사용.)
  • J. Darke: ‘Primary Generator’을 통해 초기부터 결과물을 얼추 상상한 채로 디자인한다. 이후 단계들은 어느 정도 객관화는 가능할 것이다.


사견이지만 Darke의 입장에 공감이 가는 것 같습니다. 아래 이미지는 제가 동료들과 <Bauhaus Campus 2021>이라는 해외 건축설계 공모에 냈던 계획안인데요. 자세히 보면 최종적인 건물 모습과 초기 스케치의 건물 모습이 같은 구조임을 볼 수 있습니다. 디자인의 시작단계부터 건물의 최종 모습을 상상하고, 그것을 구체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두 이미지가 비슷하죠. 실제로 제 주변 적잖은 동기들이 건물의 최종 모습을 미리 상상한 뒤 천천히 구체화하는 식으로 디자인하는 것 같습니다.

(Copyright: Park Shinwoo, Nam Jungwoo, Cho Donghyun)

한편 Rittel, Darke와 비슷한 시기에 그들과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학자들도 등장합니다. 비합리적, 직관적 디자인 방법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다시 ‘과학적’ 디자인 프로세스를 구축하려는 이들이 등장하는데요. 이들은 당시 칼 포퍼와 토머스 쿤의 과학철학의 성과를 인용해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대표적인 인물들과 그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 Hillier, Musgrove: 여러 학문 중 유독 디자인만 직관적인 것은 아니다. 또 직관이 비과학적이라는 주장 역시 오류이다.

이상으로 디자인방법론의 전개 흐름을 간단히 알아보았습니다. 더 많은 정보가 궁금하신 분들은 건축학과 건축학전공 수업 중 최재필 교수님의 ‘건축과 사회’ 강의 수강을 추천드립니다. 다음에도 건축, 디자인과 관련해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박신우

12.5기, 건축학과 건축학전공

 

<세줄 요약>

  1. 전통적인 ‘직관적’ 디자인 프로세스를 객관화해 이론적 체계를 세우려 했던 Systematic Approach (Jones, Alexander)
  2. Systematic Approach의 한계 인정, 직관적/감각적 디자인으로 회귀 (Rittel, Darke)
  3. 비합리성을 일반 과학적 행동으로 수용하려 하는 과학철학적 논의 (Hillier, Musgr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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