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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M - 학술세미나/etc

바라던 창업을 하기엔 나는

by STEMSNU 2021. 12. 17.

 

바라던 창업을 하기엔 나는

본 세미나 내용은 공우에서 곧 출판할 책 <공대에 가고 싶어졌습니다>에 실린 글을 바탕으로 합니다.
여러 공우 회원들이 쓴 양질의 글이 담겨있으니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공우 11.5기,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부 18학번 이동현입니다.

책 <공대에 가고 싶어졌습니다>에 저자로 참여하였습니다. 저의 자전적 글을 담았는데, 본 세미나는 그에 대한 내용입니다. 다만 모든 내용을 담은 건 아니니 자세한 내용 및 원문이 궁금하다면 <공대에 가고 싶어졌습니다>를 봐주세요!

레츠고

영재학교 입시를 끝낸 중3 겨울방학, 원피스라는 애니메이션에 빠졌습니다. 주인공 루피는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보물 ‘원피스’를 손에 넣어 해적왕이 되기 위해 동료를 모아 바다를 탐험합니다. 갖은 좌절에도 끈기와 의지로 원하는 바를 이루어 나가고 그러면서도 우정을 소중히 여겨, 제겐 누구보다 인간적이며 강한 소년으로 다가왔습니다. 루피를 보며 나도 저렇게 가슴이 뛰는 일을 하는 멋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동경을 품었습니다.

‘가슴이 뛰고’, ‘멋있는’ 것을 향한 열망이 있던 영재학교 시절에 찾아낸 것은 창업이라는 꿈이었습니다. 한 때 원피스에 미쳐 보듯 창업을 소재로 한 영화와 강연을 닥치는 대로 찾아보며 열망을 키웠습니다.

창업은 기반 아이템이나 아이디어가 있어야 하므로 매 순간의 발상을 메모하고 곱씹어 보곤 했습니다. 아이디어는 학교 친구들과 얘기하며 어떤 것은 거르고 어떤 것은 보완하며 계속 수정해갔습니다.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했기에 일과 시간부터 자기 전 기숙사 방에서까지 토의를 이어나갔고, 새로이 드는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 포문을 열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이디어를 적고 생각하는 게 저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당시 친해진 친구 A도 저와 같이 창업에 뜻이 있었고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구상 중이었습니다.

영재학교 2학년, 자습 중 쉬는 시간에 A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학습실의 제 자리로 와 싱글벙글 웃더라고요. 딱 봐도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 말하러 왔나 싶어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본인이 떠올린 새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A가 대뜸 기사를 하나 보여줬습니다. 기자회견 때 찍은 독일 국방장관의 사진 속 손가락을 확대해 그의 지문을 재생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글을 서너 번 다시 읽고,

“...?”
“무슨 생각 들어? 내가 이거 보고 무슨 생각을 했게.”
“거꾸로?”
“맞아 정확해.”

그의 말인즉슨, 기사 내용은 사진에서 지문을 해킹한 것인데 우리는 역으로 생각해 사진에서 지문을 자동으로 지워주는 보안 소프트웨어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시작은 특허였습니다. 출원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나름 잘 헤쳐나갔습니다. 시험 기간과 입시 준비 철이 찾아오면 일시 정지 후 다시 시작해야 했기에 속도가 빠르진 않았지만 학업과 창업을 모두 챙기고 싶었기에 최선이었습니다.

문제는 스스로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사실 간절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디어에 애정도 있고 이 아이디어로 잘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것을 유일한 방향으로 여기지 않았고 성공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온전히 해소되지 않은 것이 핑계로 작용했습니다. 이론적 토대를 준비하고 기술을 개발하고 특허 출원 이후의 계획을 세우며 느꼈던 건 스스로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확신 없이 달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많은 내·외적 갈등 속에 특허는 우리의 대입이 끝나는 시점과 비슷한 때에 출원하였습니다.

A와 함께 서울대 공대에 진학했습니다. A는 건축학, 저는 컴퓨터공학. 입학 직후는 휴식기였습니다. A도 저도 개인적인 방황이 있었고 대학이라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쁜 일상을 보냈습니다. 특허 등록까지는 적어도 2년은 걸릴 것으로 봤기 때문에 “일단 나중에 생각해”였습니다.

창업 생각을 아주 접고만 살았던 건 아닙니다. 각자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형태로 창업 활동을 이어 나갔고, 영재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서로 사유를 공유하고 자주 토의했습니다. 법인을 설립해보기도 했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기업 윤리나 인적 관리에 대한 가치관도 성립되었습니다. 창업 외적으로도 세부 전공을 탐색하고 흥미를 찾는 짧지만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불을 지핀 건 A였습니다. 서울대에는 구성원의 창업을 지원하고 네트워킹을 주도하는 ‘서울대학교 창업지원단’이 있습니다. 대학교 첫 학기에 적응되어갈 무렵, 창업지원단의 창업동아리 지원 사업을 보고 A는 제게 신청을 제안했고, 저는 큰 고민 없이 그러자고 했습니다.

PlusIT라는 이름의 단체로 신청했습니다. 창업 아이디어는 특허로 출원했던 ‘촬영 영상 내의 생체정보 보안 처리방법 및 장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실제 창업의 이행 플랜과 예산 계획서를 적어 신청하니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일단 선정이 되고 지원을 받으니 진행에 가속이 붙었습니다. 창업지원단에는 두 가지 창업경진대회가 있는데, ‘더비기닝(THE BEGINNING)’과 ‘비더로켓(BE THE ROCKET)’입니다. 우리의 다음 목표는 여름에 진행되는 더비기닝 이었습니다. 더비기닝은 단계별 심사를 거쳐 최종적으로 뽑힌 예비창업팀 혹은 기업에 리쿠르팅(인재 매칭)을 지원하고 기술 지주의 투자를 확약하는 경진대회입니다.

결과는 최종 단계 탈락.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창업지원단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지원단 사업에 선정됐던 팀들을 모아 네트워킹 행사를 기획했으니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행사 당일, 평소 연락을 주고받아 친분이 있던 지원단 직원 분께서 더비기닝 최종 우승팀 중에 우리 아이디어와 매우 유사한 팀이 있으니 얘기해보라고 귀띔을 주셨습니다. 이를 들은 A와 전 바로 그 팀 대표님을 찾아가 대화를 청했습니다.

아이디어가 정말 유사했습니다. 사진이나 영상 속 개인정보를 찾아 비식별화 하는 솔루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식별화 대상이 생체 정보보다는 텍스트로 된 정보 위주이기는 했지만 근본 맥락과 수입 모델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만난 창업 팀은 서울대 컴퓨터 비전 연구실에서 박사 과정을 밟은 세 분이 모여 창업한 팀이었습니다. 그 팀과 우리의 차이는 압도적 실력 차이였습니다. 박사까지 한 사람들과 갓 입학한 새내기 사이에는 절대적으로 학문에 쏟은 시간이 만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격차가 있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며 머릿속으로 ‘어떡하지?’란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대표님께선 아마 이런 우리의 생각을 읽으신 건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하나 하셨습니다. A와 저 둘 다 대표님의 회사 인턴으로 일해보는 게 어떠냐는 거였습니다. 우리는 회사에서 일하며 기술과 경영을 배우고 방향성을 고민할 시간을 가지는 한편, 대표님은 한창 회사를 공격적으로 키우고자 하셨기에 사업에 충분한 이해가 있는 인력이 필요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나의 첫 인턴 경험. 매일이 배움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인턴을 하며 그간 갈피를 잡지 못했던 창업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창업은 실전입니다. 창업하기 전이 스스로 역량을 키우는 시간이었다면, 창업을 시작한 순간 키운 역량을 토대로 승부를 보는 시간입니다. 일단 시작을 한 만큼 책임을 갖고, ‘창업 초기는 가파른 성장 없이는 죽음’이라는 말마따나 앞을 보고 달려야 합니다. 창업 전에는 여러 갈래의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창업을 시작하며 가능성 갈래에 제한이 걸리고 역량 발전도 정지됩니다. 물론 창업 자체와 유관한 경험은 증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공학도로서 개인의 학문적 발전은? 창업과 병행하기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적어도 제가 느낀 건 그러했습니다.
적어도 제가 느낀 ‘청년 기술 창업’은 그러했습니다.

인턴을 끝내며 자아 성찰의 결과를 개괄 식으로 적어봤습니다.

  1. 나는 늘 학문적 성장을 갈망했다.
  2. 나에겐 이른 영광보다 영광의 크기와 영속적 가치가 중요하다.
  3. 기술 창업을 할 거면 그에 걸맞은 최소한의 능력은 갖추고 해도 괜찮다. (패기가 다가 아니다.)
  4. 지금의 나는 한참 부족하고 학문에 몰두하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적으니 알 수 있었습니다. 너무 급하게만 생각했었습니다. 급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패기로운 창업자의 모습을 동경해 차안대로 좌우 시야를 가린 채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달려 정작 본질은 무엇인지,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건 무엇인지를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나를 객관화하여 보니 갈 길이 명확히 보였습니다.

여전히 창업은 하고 싶습니다. 다만 목적이 창업인 삶은 내게 바람직한 삶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학문에 집중해 성장을 일구어낸 후 언젠가 창업의 기회나 아이디어가 찾아왔을 때 성숙한 자세로 임하고 싶습니다. 한 분야에서 정상을 찍을 정도의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 된 후에 창업이라는 판에 뛰어들고 싶습니다.

A는 지금은 건축, IT, 예술 쪽으로 다양하게 관심사를 넓히며 융합을 꾀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수를 목표 삼았습니다. 현재는 전공인 컴퓨터공학을 파고들며 대학원 진학 및 유학을 바라보고 필요한 역량을 키우는 나날을 보냅니다.

대학생의 제가 교수를 동경하는 것이 고등학생의 내가 창업을 동경한 것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같다고 봅니다. 그래도 뭐 어떤가요. 매 순간 최선을 선택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그것이 설령 일전의 선택을 번복하는 것일지라도 현재의 나를 믿습니다. 또 무얼 만나 어떠한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될지가 기대될 따름입니다. 무얼 만나고 그로부터 얼마나 사유할 수 있을지는 행동하는 나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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